회복경험담
도박경험자(도박자) [성인] 시작
오늘은 도박이 제 삶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던 그 시작점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 순간은 도박을 멈춘 지 10년이 된 지금까지도 정말 생생히 그리고 선명하게 아직 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저는 아버지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IMF 때 부도를 겪고 다시 재기를 꿈꾸셨던 아버지의 사업을 돕는 건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습니다.
경제적 안정도, 직업적 성취감도 얻지 못한 채 지루한 생활을 하던 중이었죠.
그러던 어느 일요일 오후, 친한 형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대리운전 알바 제안이었습니다. 형이 친구들과 같이 강원랜드에 왔는데 2박 3일을 꼬박 새워 카드를 쳤고, 돈을 이천만 원이 넘게 땄다고 했습니다. 이제 돌아가려는데 너무 피곤하니 네가 와서 대리운전을 해주면 50만 원도 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곧장 동서울터미널로 가서 사북 행 버스를 탔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제가 이 버스를 그리 애용하게 될 줄은.
그렇게 강원랜드 앞에 도착해 형들에게 전화했습니다. 도착지에 왔으니 빨리 나오라고. 하지만 형들은 지금은 패가 너무 좋아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30분 정도 더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다시 전화했습니다. 그만 가자고.
하지만 아직도 패가 좋아서 돈을 더 따고 있다며 네가 들어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왔습니다. 내심 카지노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 기다리는 것도 심심해서 못 이기는 척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출입구에서 신분증과 입장료 오천 원을 내고 그렇게 강원랜드에 첫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형들은 나란히 앉아 블랙잭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반기며 노란색 칩 5개를 주더니 대리비라고 하더군요. 돈으로 주지 왜 이런 것으로 주냐며 투정하니 이따 같이 환전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형들 뒤에 서서 게임을 구경했습니다. 그때는 룰도 모르고 카지노에 온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정말 계속 돈을 따는 겁니다.
‘너도 한번 가보든가?’라는 말에 난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계속 돈을 따더라고요. 한 번만 걸어볼까? 잃으면 형들한테 뽀찌(경기나 도박 등에서 이기거나 많은 돈을 획득한 사람이 기쁨과 감사함의 표시로 주위 사람들에게 일정 양의 사례를 하는 것) 더 받으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칩 한 개를 걸었습니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칩 두 개를 걸었습니다. 또 먹었습니다. 베팅 한도가 삼십만 원이었는데 삼십만 원을 다 걸었습니다. 또 먹었습니다. 그렇게 1시간 반 정도 후 카지노를 나서는 제 손에는 270만 원이라는 돈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머릿속에 짜릿하게 박혀버린 강원랜드의 기억은 절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자금 중 10만 원 정도가 부족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예전이라면 당연히 알바를 구하거나 가족이든 지인에게 도움을 청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득 떠올랐습니다. ‘난 50만 원 가지고 5배를 넘게 불려본 적이 있다. 게임 룰을 몰랐는데도 그랬는데, 고작 10만 원을 따는 거라면 정말 식은 죽 먹기 아닐까? 게다가 재미도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그리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중독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정말 수도 없이 반추해 봤습니다.
그날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약속이 있어 대리운전을 거절했다면, 도착해서 전화했을 때 형들이 바로 나왔다면, 신분증을 두고 와 출입이 불가능했다면, 대리비를 칩으로 받지 않았다면, 돈을 따지 않고 그 오십만 원을 다 날렸다면… 되지도 않을 상상과 가정을 반복하며 정말 수백 번은 이 순간을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나는 도박중독에 빠지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매번 바뀌었습니다. 단도박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가 지지리도 운이 없었구나, 형들 탓이다, 하필 도박을 만나서… 온통 남 탓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도박 연차가 쌓이며 조금씩 생각이 변해갔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박이 문제일 리가 없다.
정말 도박이 문제라면 저와 같이 갔던,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땄던 그 형들도 도박중독에 빠졌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형들은 여전히 가끔 카지노도 가면서 도박을 즐기지만, 자신들의 일상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도박이 아니라 저에게 있었던 겁니다.
만약 그때 형들이 불러서 카지노에 가지 않았다면 그럼 난 아무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을까?
아니요, 아마도 그때 도박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도박이 아닌 다른 것에 빠지고 탐닉했을 겁니다. 그게 술이든, 마약이든.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도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했을지도 모릅니다. 지지리도 운이 없어 도박을 만난 게 아니라 운 좋게 도박을 만나 제 문제들이 드러날 수 있게 되었고 나를 성찰하며 지금 이렇게나마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다 2023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회복수기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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